스포츠 동계 올림픽 역사 3부

동계 올림픽 역사

1964년 ~ 1980년

1964년 동계 올림픽은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열렸다. 인스부르크는 예로부터 동계스포츠 휴양지로
이름난 곳이었지만 이번에는 눈이 너무 적게 온 탓에 오스트리아군을 투입해 눈과 얼음을 경기장에 공수
해야 했다.

소련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리디아 스코블리코바가 스피드스케이팅 전 종목을
휩쓸며 4관왕을 달성하였다. 이전 대회 금메달과 함께 총 6개의 금메달을 따게 되면서 동계올림픽
다관왕 기록을 경신하였다.한편으로 루지 종목이 이번 대회부터 처음 도입되었으나, 올림픽 대비
훈련에서 한 선수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대중의 인식이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하였다.

1968년 동계 올림픽은 프랑스의 그르노블 마을에서 열렸으며, 사상 처음으로 컬러TV 방송으로
중계된 대회기도 했다. 총 27개국 1,158명의 선수가 35개 경기에 출전하였다. 프랑스
 장클로드 킬리 선수는 남자 알파인스키 전 종목에서 우승하였으며, 이는 동계올림픽 역사를 통틀어
두 차례밖에 없었던 기록이기도 했다

(다른 한 명은 1956년 올림픽의 토니 사일러).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대회 중계권 판매로 200만 달러의 수익을 거뒀으며 이는 인스부르크 올림픽 당시 수익에 2배에 달하는 수치다. 
한편 각 종목의 경기장이 너무 넓게 분산되어 있었던 탓에 선수촌이 세 개씩이나 필요했다. 조직위 측은
기술 발전을 수용하기 위해선 어쩔수 없는 일이라 해명하였지만, 실은 텔레비전 방송에 가장 용이한
경기장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를 위해선 선수들을 희생하고 비효율적인 배치를 적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1972년 동계 올림픽은 일본 삿포로에서 열렸는데 북미와 유럽 밖에서 개최된 최초의 동계올림픽이었다.

그러나 이 대회는 프로선수 참가 논란이 잇따른 대회이기도 했다. 대회를 3일 남기고 에이베리
브런디지 IOC 위원장은 대회에 출전하려는 일부 알파인스키 선수들을 배제토록 했는데 미국의 
매머스 산에서 열린 스키캠프에 상금을 노리고 참가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즉 선수로서의 지위로
금전적인 이득을 취했고 더 이상 아마추어 선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격론 끝에 해당 선수들 중 가장
많은 상금을 받았던 오스트리아의 카를 슈란츠 선수만 출전자격이 박탈됐다.또 아이스하키 강국
캐나다는 1972년은 물론 다음 대회에서도 팀을 내보내지 않았는데, 프로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을 내보낼
수 없다는 점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다.한편 이번 대회에서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 오초아 선수가 
알파인스키 회전에서 우승하여, 스페인 출신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계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1976년 동계 올림픽은 다시 한번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열렸는데, 여기에는 복잡한 사정이 있다.
1970년 첫 발표 당시에는 미국 콜로라도주 댄버가 개최지로 결정됐다. 미국에서 열렸다면 콜로라도
탄생 100주년,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1972년 11월 콜로라도 주에서
올림픽 대회 공금지원 여부에 대한 주민투표를 진행해 3-2로 반대하면서 개최를 포기하게 되었다. 
IOC는 1976년 동계올림픽 개최후보지로 나섰던 밴쿠버-가리발디에게 개최권을 넘겼으나, 지방정부가
바뀌고 올림픽 유치에 난색을 표하는 입장으로 급선회하면서 불발되고 말았다. 이에 미국의 솔트
레이크시티가 올림픽 유치를 자처하고 나섰지만, IOC는 지난 1964년 대회를 개최했던 경기시설이 아직
잘 보존되어 있는 인스부르크에 요청하는 쪽을 택하였다. 대회 준비시간은 이제 절반으로 줄어들긴
했지만, 결국 인스부르크 측은 1973년 2월 동계올림픽 대체 유치를 받아들였다.이번 대회의 올림픽 성화는
두 차례에 걸쳐 타올랐는데 이는 오스트리아가 두번째로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게 된 것을 기념한다는
의미였다.1976년 동계올림픽에서는 인스부르크 근처에 있는 마을인 이글스에 봅슬레이 루지 통합경기장
처음으로 신설하였다.또 소련 아이스하키팀이 올림픽 4연패를 달성하였다.

1980년 동계 올림픽은 1932년 동계올림픽을 개최한 전력이 있었던 미국의 레이크플래시드에서 다시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처음으로 동계올림픽 보이콧 사례가 나왔는데, IOC가 중화민국 선수단 측에 선수단명과
국가를 바꿀 것을 지시하는 권고를 내리면서 중화민국 선수들이 대회 참가를 자진취소했다.이 당시 IOC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올림픽 무대에 초대하고자 했고,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중화민국이 쓰던 국가명(‘중국’)과
국가를 그대로 쓰길 원하던 상황이었다.결국 중화민국 선수단의 보이콧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선수단으로
대신 구성된 ‘중국’ 선수단은 1952년 하계 올림픽부터 불참한 이후 처음으로 올림픽에 참가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미국의 에릭 하이든이 스피드스케이팅 전 5종목에서 올림픽과 세계 신기록을 모두 달성하는
진풍경을 선보였다. 또 동시에 다섯 개인경기에서 모두 금메달을 땀으로서, 동하계를 통틀어 한 대회에서
개인종목을 가장 많이 우승한 기록을 경신하게 되었다.또 리히텐슈타인의 하니 벤첼이 알파인스키 회전과
대회전에 출전해 모두 우승하면서, 리히텐슈타인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한 국가라는 진기록을 세우게 되었다.이 대회를 언급할 때 놓칠 수 없는 또
한가지 하이라이트, 이른바 ‘은반위의 기적‘은 일반 대학선수로 구성된 미국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이
노련한 전문선수로 구성된 소련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과 결승전에서 맞붙고, 끝내 승리해 금메달을
차지했던 사건이다.

1984년 ~ 1998년

1984년 동계 올림픽은 유치전 당시 일본 삿포로, 스웨덴 고텐부르그가 유력 개최후보로 떠올랐으나
예상을 뒤엎고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가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이어
두번째로 공산권 국가에서 개최된 올림픽이었지만 대회 자체는 뛰어난 조직력으로 호평을 받았고,
특히 불과 8년 뒤 유고슬라비아는 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으나 대회 당시에는 별다른 영향 없이
안전하게 치러졌다. 총 49개 참가국 1,272명의 선수들이 39개 세부종목에 출전하였다.

개최국인 유고슬라비아는 알파인스키 선수 유레 프란코가 대회전 종목에서 은메달을 차지하면서
동계올림픽 첫 메달 획득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또한 영국의 아이스댄서 제인 토릴과 크리스토퍼 딘
피겨 프리에서 라벨의 <볼레로>에 맞춰 완벽한 연기를 선보여, 그전까지 전무했던 예술점수 만점 고지를
달성하며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1988년 동계 올림픽은 캐나다 캘거리에서 16일간 열렸다.[60] 스키점프와 스피드스케이팅에 새 종목이
추가되었고 훗날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는 컬링, 쇼트트랙, 프리스타일 스키 등도 시범종목으로 선보였다.

그리고 사상 처음으로 스피드스케이팅을 실내 (올림픽 오벌)에서 진행하였다. 이번 대회에서는
네덜란드의 이본 판 게니프가 매 경기마다 노련한 동독 선수들을 누르고 대회 3관왕과 세계신기록 2회
경신을 달성하였다.[61] 또 핀란드의 스키점프 선수 마티 니케넨이 출전종목 세 종목에서 모두 금메달을
따면서 똑같이 3관왕을 달성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알베르토 톰바는 첫 올림픽 출전임에도 불구하고
알파인스키 대회전과 회전 종목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화려한 데뷔전을 마쳤다.

한편 동독의
 크리스타 로텐부르거는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1,0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는데 불과 7개월 뒤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사이클 트랙 종목에 출전해 은메달을 따는 기염을 토했다. 로텐부르거의 기록은
같은 해에 치러진 동하계 올림픽에서 모두 메달을 따낸 최초의 기록이 되었으며, 1994년부터 동하계
대회가 2년 격차를 두고 열리게 되었기에 앞으로도 없을 유일무이한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1992년 동계 올림픽은 하계 올림픽과 같은 해에 치러진 마지막 대회였다. 이번에는 프랑스 사부아
중심지 알베르빌에서 열렸지만, 정작 알베르빌 시내에서는 18개 경기밖에 진행되지 않았다. 나머지
경기들은 사부아 전역에 걸쳐 분산 개최되었다.한편 공산권 붕괴와 베를린 장벽의 붕괴 등으로 인한
정치상황 급변으로 올림픽 선수단에도 영향이 나타났는데, 독일의 경우 1964년 대회 이후 처음으로
서동독이 한 팀이 되어 출전하게 되었으며 구 유고슬라비아에 속했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독립국으로서 올림픽 무대에 첫 진출하였다. 구소련 진영 국가들은 대부분 연합 선수단이라는 이름의
단일팀으로 출전하였지만 발트3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온전한 독립국으로서 출전하기도 하였다.

 핀란드의 스키점프 선수 토니 니에미넨은 불과 16살의 나이로 금메달을 획득해 동계올림픽 남자
금메달리스트 중 최연소라는 영예를 안게 되었고,뉴질랜드의 앤리스 코버거는 알파인스키 여자 회전
종목에서 은메달을 획득해 남반구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동계올림픽 메달을 획득하게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의 김윤만이 스피드스케이팅에서 은메달을 따냈고, 뒤이어 쇼트트랙의 김기훈이 금메달을
차지하여 동계올림픽 첫 메달과 첫 금메달을 동시에 달성한 대회가 되었다.

1986년 국제올림픽위원회가 같은 해에 치러지던 동하계 올림픽 대회를 분리시켜 2년 격차로 연다는
결정을 투표를 통해 최종 확정하였고, 1994년 동계 올림픽부터 이 결정을 따르게 되었다. 노르웨이 
릴레함메르에서 열린 이 대회는 처음으로 하계 올림픽에 2년 앞서 치러진 대회가 되었다.1993년 
체코슬로바키아 해체를 겪은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별개의 선수단으로서 동계올림픽에 처음 출전했다.

한편 1994년 1월 6일 미국의 피겨스케이팅 선수 낸시 케리건이 경쟁자 토냐 하딩의 전 남편의 사주로
피격을 받는 사상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면서, 여자 피겨스케이팅 경기가 새삼 언론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케리건과 하딩 모두 대회에는 정상 출전하였으나 캐리건만 은메달을 획득하였고, 우크라이나
 오크사나 바이울이 우승하면서 고국에 첫 금메달을 안겼다.한편으로 개최국 노르웨이가 처음으로 스피드
스케이팅 전 종목에 출전해 3관왕을 달성하였고, 대한민국의 김윤미 선수가 만 13세의 나이로 쇼트트랙
단체계주 금메달을 차지하면서, 동계올림픽 역대 최연소 금메달리스트로 남게 되었다.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대회 폐막식에서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이 사상 최고의 동계올림픽 대회였다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1998년 동계 올림픽은 일본 나가노현에서 열렸으며 처음으로 2,000명이 넘는 선수가 출전하였다.그리고
 아이스하키 경기에서 처음으로 프로선수들도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NHL 출신의 쟁쟁한 선수들이
몰려있는 캐나다와 미국 팀이 유력 우승후보로 떠올랐으나, 두 국가 모두 메달 획득에 실패하고 체코 팀이
우승하였다.한편 이번 대회에서 처음으로 도입된 여자 아이스하키에서는 미국 팀이 첫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노르웨이의 비외른 데리에 선수는 이번 대회 노르딕복합에서 3관왕을 차지하면서 통산 금메달 9개,
전체메달 12개로 가장 성공한 동계올림픽 선수로 기록되었다. 또 오스트리아의 헤르만 마이어는 다운힐
경기에서 충돌 사고를 겪었으나 가까쓰로 살아남고 슈퍼대회전과 대회전 종목에서 각각 우승하였다.

미국의 타라 리핀스키는 만 15세의 나이로 피겨스케이팅 여자종목에 출전해 1위를 차지하면서, 개인
종목으로는 역대 최연소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또 스피드스케이팅에서는 클랩 스케이트 (분리형
스케이트)가 처음 도입되면서 세계신기록이 쏟아져나오기도 하였다.

손오공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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